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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 Climbing

청옥산에서 태백산까지

by 변기환 2013. 12. 26.

2013년 마지막 산행을 떠납니다. 그동안 밋밋하고 맹숭맹숭한 곳만 다녀왔으니 오늘은 청옥산에서 태백산까지 23km, 8시간 장거리 코스를 다녀올까 합니다. 혼자 갈까 하다가 같이 갈 선수를 섭외하니 구미 선수가 손을 드네요.


오랜만에 푸근하고 바람한 점 없으니 장거리 등산하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아무도 못 알아보게 10년 전 모습으로 뽀삽질 한 사진으로 출발지 인증합니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칠지 모르는 순진한 구미 선수가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함을 예감했는지 도가니부터 단속하는군요.



등산로가 따로 있지만 갈 길이 멀기에 거리를 단축하고자 임도를 따라 오릅니다.



임도를 따라 청옥산을 오른 다음 능선길을 따라 두리봉, 깃대배기봉을 지나 태백산 천제단 찍고 당골로 하산하는 코스입니다. 오전 9시 30분 출발 오후 4시 천제단 도착 5시까지 당골로 하산해서 해물파전에 동동주 한 사발하고 6시 버스를 타고 출발지인 넛재로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눈이 제법 많이 쌓였는데 벌써 많은 사람이 청옥산을 다녀갔군요.



태풍 루사가 지나간 후 임도를 보수하기 위해 새로 닦은 임도에 누군가가 반듯한 흔적을 남겼네요.



나도 언젠가는 저 가랑잎처럼 말라 비틀어지겠지요.



낮에 뜬 달만 보면 올 2월 8시간 넘게 속리산을 헤매고 다녔던 때가 떠오르는데 초장부터 슬슬 불길한 조짐이 보입니다



청옥산 탐방 안내소에서 출발한 임도와 석포 대현리를 잇는 임도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임도와 임도 사이에 넛재로 향하는 등산로가 나 있고 여기에서 청옥산 정상까지는 약 500m 거리입니다.



해발 800m 넛재 중턱이 들머리라 정상까지 고도차가 420m라곤 하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산을 오르는 등산로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소위 말하는 '깔딱고개'가 없어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 바로 아래엔 2000년 조성한 9천여 평의 인공습지가 있어 등산과 생태탐방, 습지관찰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산입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반가운 태백산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봉화의 3대 명산인 해발 1,277m 청옥산... 산 아래 푸른 옥이 많이 난다고 해서 청옥산이라 하는데 청옥산은 열목어 서식지인 백천계곡과 70리 고선(구마) 계곡이 시작되는 곳이며 근처에 청옥산자연휴양림이 있습니다



멀리 태백산과 구룡산을 잇는 백두대간 능선이 손에 잡힐 듯 뚜렸합니다. 몇 년 전 이글거리는 8월 땡볕에 춘양 참새골에서 출발해 태백산 천제단까지 8시간 넘게 걸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청옥산엔 정상 표시석이 3개나 서 있습니다. 눈이 60cm 이상 쌓였군요.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전혀 없고 등산로도 눈에 파묻혀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몇 걸음 가보니 눈이 무릎까지 빠지길래 완전 무장을 한 후 다시 도전합니다.



발목은 기본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빠지는군요.



오랜만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게 아직은 기분이 좋네요.



무릎까지 빠지기도 하고 어떤 곳은 허리까지 눈이 쌓여 있습니다.



눈을 헤치고 걷는 게 지루할까 봐 조릿대도 반기고...



멀리 대현리에 우뚝 솟은 달 바위도 보입니다.



거리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별 도움은 되지 않지만, 가끔 반가운 이정표도 서 있네요.



눈 참 지겹게 쌓였습니다.



눈 위에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길래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사람 발자국은 아니고 무슨 짐승인지 발바닥 크기가 거의 내 손만 하네요. 20cm가 넘게 쌓인 눈에 발이 끌린 흔적이 없으니 꽤 큰 짐승인 것 같습니다.



저 흔적이 깃대배기봉까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합니다.



계속 눈을 헤치고 걸었더니 슬슬 지치기 시작합니다.



12시 30분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1시 17분 어디쯤 왔는지 지도를 보니 아직 멀었군요. 5시까지 태백산 천제단에 도착하기는 글렀네요. 일단 사실을 숨기고 지쳐 헐떡이며 따라오는 구미 선수를 다독거립니다. "김샘 거의 다 왔어 힘내 ㅠㅠ"



그렇게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몇 시간을 걸었건만 돌아보니 청옥산은 한 시간 전에 쳐다본 그 위치 그대로네요.



우거진 잡목들 사이로 두리봉이 살짝 보입니다. 갈 길은 멀고 구미 선수는 자꾸 뒤처지고...



이 지점이 현불사와 소천 구마계곡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이정표를 보니 반갑기는 한데 예상보다 엄청 늦어졌다는 걸 생각하니 발걸음이 더욱 무겁네요.



평소 같으면 2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눈을 헤치며 걸으니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갑니다. 1시간을 걸었는데도 여전히 같은 곳을 맴도는 듯합니다.



본격적으로 두리봉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두리봉을 오르는 약 500m, 두리봉과 깃대배기봉을 잇는 500m 구간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두리봉엔 눈이 허벅지까지 쌓였습니다. 500m를 가는데 거의 1시간 이상 걸린 것 같습니다. 눈을 헤치며 등산을 하는 것을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 소모가 많아 30분 혹은 100m씩 교대로 앞을 서는데 등산 초보인 구미 선수를 앞에 세울 수 없어 혼자 5시간 이상 러셀을 했습니다.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기를 수십 번 대부분 시간을 길 찾는데 허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등산객이 매어 놓은 리본이 곳곳에 걸려 있어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꾸역꾸역 오르니 두리봉 정상이 가까워지긴 하네요.



어느덧 해는 기울고...



5시간을 러셀을 했더니 다리를 들 힘도 없네요. 무릎까지 빠지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다리를 다시 무릎까지 들어야 하는 자세를 반복하니 다리를 들때마다 사타구니가 저려옵니다.



러셀 하는 장면을 셀카로 찍은 후 편집을 했습니다.



오후 4시 17분 기를 쓰고 깃대배기봉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천제단까지 2시간... 5시까지 당골로 하산해 해물파전에 동동주 한 잔하고 영주에서 찐하게 푸기로 했던 꿈은 멀리 날아갔고 무사히 내려가기만을 바라야겠습니다. 김샘 오늘 2차는 커녕 1차도 없다.



여기서부터 천제단까지는 대간 길이라 대간을 타는 등산객이 눈을 다져놨으니 걷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갈 길은 멀고 바쁜데 구미 선수 무릎이 아파 가다 쉬다를 반복하니 두 시간 안에 천제단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5시 해가 졌습니다.



산속이라 금방 어둠이 내립니다. 아직 천제단이 1.3km 남았군요.



6시 30분 천제단에 도착했습니다.

무릎이 아파 발걸음을 옮길 수 없는 구미 선수 때문에 망경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마음씨 좋은 분께 사정을 얘기했더니 흔쾌히 방문을 열어 줍니다. 잠시 후 따끈따끈한 저녁도 주시고...

저녁을 먹고 30분 정도 언 몸을 녹이고 나니 구미 선수 무릎이 많이 좋아져 슬금슬금 조심스럽게 당골로 하산을 했습니다.

당골에서 택시를 타고 넛재에 도착하니 9시 30분... 오늘 10시간을 걸었고, 12시간 만에 출발지로 돌아왔습니다. 영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단골 고깃집에 예약을 하고 삼겹살에 소맥 몇 병을 급하게 말아 먹었더니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피곤이 몰려옵니다.

하루하루가 사는 게 의미 없고 몸도 마음도 푸석푸석해지는 중년... 2013년 마지막 등산은 평생 잊지 못할 진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김샘 고맙소. 그리고 집사람한테 나하고 산에 갔다 왔다는 얘기 절대 하지 마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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