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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 Climbing

죽을 뻔 했던 속리산

by 변기환 2013. 2. 17.

창녕 화왕산을 간다는 구미선수와 상주 사는 선수를 꼬드겨 속리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가볍게 다녀오자고 시작한 게 산속을 8시간 넘게 헤매고 말았다. 계획은 차를 화북분소와 장각폭포에 두고 화북분소를 출발해 문장대, 신선대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다음 장각폭포로 하산하는 약 6시간 30분 코스...


그런데 상주 사는 선수가 갈령에서 출발해 형제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천왕봉, 신선대, 문장대를 지나 화북분소로 가는 코스가 있단다. 시간은 약 3시간 30분 ???


이 구간이 대간 길이고 대간 길이라면 한때 종주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어 코스와 예상 시간을 대충 안다. 내가 알기에는 최소 8시간 거린데 3시간 30분이라 어림도 없다. 천왕봉을 한 시간 만에 오르는 코스가 있다는 건데, 그것도 갈령에서 ???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상주 선수가 추천하는 그런 코스는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공수부대 출신이고 가끔 험한 코스도 다니는 분이라 내가 모르는 지름길이 있나 보다 생각했다.


이걸 믿은 게 첫 번째 실수였다.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게 네이버 지도를 보면 천왕봉과 형제봉 이전 지점인 봉황산 출발지 거리가 8.6km, 4시간이라고 되어 있다. 네이버 등산 지도는 평소 등산 전 반드시 참고하는지라 이를 찰떡같이 믿고 갈령재 형제봉 1시간, 형제봉에서 천왕봉까지 약 2시간 예상, 천왕봉 화북분소까지 약 3시간 30분, 얼추 6시간 30분이면 될 것 같았다. 지금 자세히 찾아보니 지도도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이리저리 눈이 뭐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그렇게 멋대로 상상하고 점심으로 작은 컵라면 3개를 준비했다. 간단하게 컵라면을 먹고 중간에 배가 고프면 신선대나 문장대 매점에서 대충 요기하고 상주로 가서 오랜만에 셋이서 거하게 한잔하고 1박 하는 것으로...


화북에서 만나 화북분소에 차를 세워 놓고 내 차로 갈령재에 도착했다. 10시 30분 갈령재를 출발... 평소에는 내가 각자 준비한 간식과 물 등을 꼼꼼히 체크하는데, 빨리 등산하고 내려와 한잔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지 아무 생각없이 출발했다. 이 게 두 번째 실수였다.


한참을 오르니 산돼지 떼가 계곡을 가로질러 몰려간다. 낮에 산돼지를 보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요즘은 눈이 많이 내려 먹이가 부족해선지 낮에도 가끔 본다. 산에서 산돼지를 만나면 사람도 놀라지만 산돼지는 더 놀란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지들이 놀라 먼저 도망치는데 호들갑을 떨거나 위협을 하면 사나워진다. 산에서 산짐승을 만나면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해 어떤 곳은 눈 아래가 꽁꽁 얼어 매우 미끄럽다.


땅이 이마에 닿을 만큼 가파르고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 보니 거친 파도 같은 능선 너머 천왕봉이 보이고


발아래 펼쳐진 풍경은 아름답지만


가야할 형제봉은 아직 아득하다.


천왕봉과 곤노봉 입석대로 이어진 바위 능선이 마치 공룡의 등뼈와 같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다.


꾸역꾸역 오르니 형제봉이 점점 가까워진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아니다. 짐승이 다닌 흔적이다. 발자국 하나가 내 손바닥만 하다,



천왕봉 갈령재 비재로 갈라지는 삼거리


비재 형제봉 속리산 너머 널재까지 약 20Km 거리는 백두대간 속리산 구간이다.


눈이 50cm는 쌓였다. 목을 축이려고 물병을 보니 물병이 비었다. 화북에서 물을 사 담는다는 게 깜박 잊고 그냥 왔다. 아차 해서 가지고 온 물을 살펴보니 구미 사는 선수는 아예 물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물이라고는 상주 선수가 준비한 달랑 500mL 하나... 이미 1시간 20분을 올라왔기 때문에 다시 내려가 물을 가져올 수도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 형제봉으로 출발 


얼마나 미끄러운지 진도가 안 나간다.


갈령을 출발한 지 1시간 30분 형제봉에 도착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천왕봉으로 출발



이 표지판을 보는 순간 뭔가 한참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2시간 30분 걸렸다. 여기서 천왕봉까지 2시간 30분을 더 가야한다. 지금 시각이 오후 1시 천왕봉에 도착하면 3시 30분 서두르지 않으면 7시가 넘어 화북분소에 도착할 수 있다. 천왕봉까지 가지 않고서는 중간에 빠져나올 곳도 없다. 무조건 가야 한다.


형제봉에서 천왕봉 구간은 평지가 거의 없다 오르고 내려가고 또 오르고 또 내려가고를 반복하는 지겹고 힘든 구간이다.


오후 2시 물은 진작에 떨어졌다. 다행히 상주 선수가 당근 몇 조각과 한라봉 2개를 가져와 갈증과 허기를 좀 면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왔지만, 천왕봉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다. 이건 마치 달을 쫓아 가는 것 같다.


구미 선수가 아들이 여친에게 발렌타인 선물로 받았다는 초콜릿을 슬그머니 꺼내 놓는다. 이 상황에 하나 더 먹겠다고 욕심부렸다 간 싸움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첩첩산중이다.


포기!!!


허기가 져 다리가 떨리고 목이 말라 도저히 못가겠다. 이쯤에서 코스를 잡은 상주 선수에게 야속한 눈치 한번 주고...


생각해보니, 몇 년 전 이 선수들과 한겨울 덕유산을 셋이서 김밥 두 줄을 나눠 먹고 6시간을 헤맨 적이 있다. 덕유산은  산장이 있어  뭐라도 사 먹을 수 있었는데, 구미 선수가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걸음이 늦어 곤돌라를 못 탈까 봐 먹을 걸 보고도 지나쳤다.


그땐 내가 김밥을 잃어 버려 생긴 일인데, 구미 선수가 발 뒤가 까져 내가 배낭에서 구급상자와 김밥을 꺼내고 넣는 과정에 김밥 봉지가 다리 밑으로 떨어진 걸 몰랐던 것이다. 다음부터 이 선수들과 어디 다닐 땐 더 꼼꼼하게 챙겨야겠다.


저 달이 뜰 때까지 산속을 헤매지 않을까 걱정 된다.


그렇게 며칠 굶은 거지꼴을 하고 천왕봉 아래까지 왔다.




허기가 져서 한 발짝 떼기도 힘든데 천왕봉은 너무 가파르다.


이쯤 되면 체면이고 위생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갈령재를 출발한 지 정확히 6시간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다. 현재 시각 4시 37분 예상보다 1시간이 더 걸렸다.



저 힘차게 쭉쭉 뻗은 산맥 어딘가 우리가 지나온 형제봉이 있건만, 산세가 험해 어딘지 가늠 조차할 수 없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문장대 방향



지금 시각이 5시 이 시간에 문장대를 거쳐 화북분소까지 내려가기엔 도저히 무리, 고집부렸다간 최악의 순간 산악 구조대 등에 업혀 내려올 수 있다. 그래서 장각동으로 하산하기로 결정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돌아보고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장각동으로 하산한다.


하도 배가 고파 한라봉 껍질도 씹어 먹었다. 처음엔 달지만 씹을수록 쓴게 사람이 먹을 게 못더라. 그래도 나는 두어 조각은 씹어 먹을 것 같다.


6시 드디어 개울물을 만났다. 빈속에 찬물을 마구 마셨더니 배가 살짝 아프다.



6시 30분 장각동에 도착했다. 천왕에서 장각동까지 2시간 걸렸다. 오늘 작은 컵라면 하나 먹고 총 8시간을 걸은 셈이다.


장각동에서 마음씨 좋게 생긴 마을 아저씨에게 먹을 걸 파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니 없단다. 그럼 택시를 불러 달라니 택시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번호를 모르고 집에 라면 사둔 게 있는지 물으니 그건 거 없단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각동 주민 대부분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유기농 재배를 하는 "한농 복구회"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고기, 시중에 파는 빵, 과자, 조미료, 인스턴트 식품 이런 거 안먹는다. 그러니 집에 라면이 있을가 없지.


우리 꼴이 측은했는지 화북까지 태워 주겠단다. 하도 고마워 기름값이라도 줄려니 그런 거 받으려고 태워준 게 아니라며 황급히 차를 돌려 횡하니 사라진다. 이분이 아니었으면 장각동에서 화북면까지 1시간은 더 걸었어야 했다. 화북에서 택시를 불러 갈령으로 갈령에서 다시 내 차로 화북분소로 가서 각자 차를 이용 상주로 이동


뜨끈한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나니 눈꺼풀이 살짝 감기는 게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이 상태에서 술 몇 잔하면 바로 쓰러질 것 같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져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씻지도 않고 죽은 듯 쓰러졌다.

집으로 오는 길에 뭔가가 뒷좌석에서 시끄럽게 굴러다녀 살펴보니, 물이 가득 찬 1L 물병 ㅠㅠ 두 선수중 누군가가 아침에 내 차로 화북분소에서 갈령재까지 가던 중 빠트린 듯 하다. 오늘 배운 교훈 "상주 선수가 추천한 코스는 섣불리 따라 나서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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