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대지에 촉촉한 가을비가 내립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여행의 계절 가을, 어디를 갈지 정하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단풍을 따라 남으로 달리다가 경천대 이정표를 보고 경천대로 행선지를 정했습니다. 경천대 가는 길에 상주박물관을 잠시 둘러봅니다.
비가와서 그런지 썰렁하네요.
박물관은 어마 무지 크지만, 전시동은 절반도 안 됩니다.
주로 상주에서 출토된 토기, 청동기, 도자기, 고서 등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편지를 써 우체통에 넣으면 배달 한다고 하는데 결정적으로 편지지와 봉투가 없습니다.
목디스크 걸리듯...
상주는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와 건물 짓기 쉽잖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발아래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전시된 도자기가 대부분 청자와 백자며 일부는 송나라에서 수입한 명품 도자기였다니 당시 상주의 문화 수준이 강남쯤 되었을 듯...
상주를 삼백의 고장이라고 하는 데 누에고치와 곶감, 쌀을 삼백이라 합니다. 그래서 누에치기를 재현한 모형과...
감을 말려 곶감을 만드는 과정을 전시해 놓았네요.
역사 공부를 마치고 박물관 앞 카페에 들러 난로의 따듯한 열기를 느끼며 쉬어갑니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께서 카페를 운영하시는데 주문하고 한참을 기다려도 커피를 주지 않길래 물어보니 그새 잊어버렸다고 하십니다.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경천대 전망대를 찾아 오릅니다. 1박 2일 TV 프로에 소개된 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옅은 안개가 전망대를 살짝 가렸습니다.
조망은 폭삭 망했네요.
잠시 기다리니 조금 걷히긴 하는데 기다려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천삼백 리 낙동강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경천대...
경천대 옆으로 무우정이 살짝 보입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갈 때 함께 따라가 고생을 했던 우암 채득기 선생은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합니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선 무우정은 바로 우암 채득기 선생이 머물며 마음을 다스린 곳입니다.
선생도 나처럼 정자끝에 앉아 무심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보았을 듯...
밋밋한 풍경도 화려한 단풍이 드니 그림 같고...
가을비에 젖은 단풍은 더 쓸쓸하고...
텅빈 거리엔 그리움만 소복히 쌓여 갑니다.
불타는 단풍은 일상적인 풍경조차 추억을 만들고...
심지어 집사람의 뒷모습까지 아름답게 합니다.
그리고 단풍은 낙동강을 따라 느리게 쓸쓸한 흔적을 남기며 무감히 흘러갑니다.
단풍도 젖고...
내 마음도 젖고...
가을도 젖고...
갑자기 가을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에게 주체할 수 없는 연민이 드네요.
자전거 박물관은 집사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입구에서 고마 발길을 돌립니다.
대신 자전거 박물관 근처에 있는 국립 낙동강생물 지원관을 찾았습니다. 올해까지 무료로 개방한다고 합니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호랑이가 고라니를 쫓는 역동적인 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에 분포하는 온갖 포유류를 전시해 놓았는데...
만들었다고 보기엔 너무 사실적이라 만든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죽은 동물을 박제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죽어 박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수의 동물이 교육 또는 전시라는 명분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씁쓸해지네요.
천천히 둘러 보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낙동강에 서식하는 조류와 민물고기는 따로 전시해 놨습니다.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여기가 도떼기 시장인지 어린이집인지...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는 것도 공공장소 예절을 배우는 것도 교육인데...
역사 공부와 생물 공부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차로 약 30분을 달려 퓨전 한식집에 들렀습니다.
이 식당은 올 초 상주 사는 분의 대접을 받은 적이 있어 다시 찾았는데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3시가 훌쩍 넘었지만, 손님이 어마 무지 많네요.
반반 정식을 주문했는데 한우와 한돈 너비아니가 화로에 얹혀져 먹는 내도록 따듯함을 유지합니다. 주인장의 정성과 배려가 느껴집니다. 다른 고장 음식을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주의 음식은 거의 쓰레기 수준입니다.
퓨전요리를 먹고 나면 상은 치워지고 찰기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밥과 담백하게 끓여낸 된장국에 정갈한 반찬 몇 가지가 곁들여집니다. 짠 거 못 먹는 내겐 간이 딱 맞는데 옆 테이블의 손님은 싱겁다고 불평을 하네요.
떠나기 좋은 계절 가을...
어디를 가도 추억이 되고 ...
어디를 가든 기억에 남는...
가을은 여행의 계절입니다.
가을이 있어 행복하고...
가을 때문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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