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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또 다시 봄

by 변기환 2017. 3. 6.

지난 목요일 갑자기 주말여행을 가자는 집사람의 명을 받아 급하게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코스를 짰습니다. 첫 번째 방문할 장소는 구례 화엄사입니다.

내복을 벗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동백꽃이 막 봉우리를 터트리고...

산수유도 점점 복스러워지며...

매화도 슬슬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홍매화는 언제봐도 화려하기 그지없네요.

화엄사 일주문을 들어서자, 장터도 아닌데 각종 기념품과 고로쇠 수액 등 등을 팔고 있습니다.

종교가 그들만의 벽을 허물고 좀 더 현실에 다가서려는 것은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었네요.

고찰이 주는 엄숙함이나 경건함은 간곳없고 마치 잘 꾸며진 드라마 세트장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종교인의 뜨거운 신앙은 내면으로 심화 돼야지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며, "진정한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지리산 노고단 자락이 보입니다.

목조 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 앞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 서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을 배경으로 섬진강이 내려보는 곳에 위치한 화엄사는 풍수의 풍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천하의 명당자리네요.

화엄사 관람을 마치고 두 번째 코스인 화개장터에 도착했습니다.

주말을 맞아 행락객으로 무쟈게 밀리네요.

어디 보자 야관문이 어디 있더라?

요즘은 관광지 어디를 가도 좀처럼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데 여긴 대놓고 호객행위를 하네요.

꽃피는 3월부터 가정의 달인 5월 초순까지 대한민국은 어딜가나 사람으로 미어터집니다.

트로트 공연에 약주 한사발 걸친 할배들만 신났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 치는 북소리와 트로트 가락이 엇박자로 노는 걸 보니 여기가 장터가 맞긴 맞네요.

요즘 장사가 잘 안될 듯...

내 고향 억지 춘양장에 비하면 사람만 많았지, 볼 게 없기는 매한가지네요.

요즘 제철인 민물 굴인 벚굴 가격이 ㅎㄷㄷ...

급하게 예약한 오늘 묵을 곳입니다. 주말 숙박 요금이 오성급 호텔 뺨을 쌍으로 때리는 가격입니다.

16평짜리 원룸을 잡았는데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네요.

다만, 전망은 끝내줍니다.

술을 합리적으로 마시라는 집사람의 명을 받아 매우 합리적으로 준비했는데 왠지 부족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네요.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막냇동생이 추천한 곳에 저녁 먹으러 왔는데 문을 안 열었습니다. 이 집이 막냇동생 결혼식 피로연 장소였는데 그때 먹은 재첩국이며 재첩 무침이 무척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급히 동생에게 SOS 친 결과 인근 식당을 수배해 주네요.

늘 느끼는 거지만,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반찬 가짓수가 많아지는데 막상 먹어보면 남쪽이나 북쪽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얼큰한 참게탕과 참게를 통째로 갈았다는 참게가리장 사이에 결정 장애를 앓다가 주인의 중재로 참게가리장을 주문했는데 청양고추와 들깻가루의 절묘한 배합과 남자에게 무조껀 좋다는 주인 아줌마의 의미심장한 말에 홀려 무려 세 그릇이나 비웠네요.

내가 쭉 지켜봤는데 게장은 절대 밥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막냇동생 장모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식당 주인에게 전화하셔서 한사코 밥값을 안 받고 그 와중에 막냇동생 처가에 들러 배즙 두 박스까지 얻어 왔네요. 나나 집사람이나 나이가 드니 점점 염치와 불구가 없어지는 듯...

어제 저녁 과식했으니 아침은 330칼로리로 가볍게 시작한다.

아~ 드디어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박경리 선생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을 찾았습니다.

남자가 시계에 끌리 듯 녀자는 가방에 끌리는 듯...

최서희는 참으로 현명한 여자입니다. 아버지 친구 아들인 이상현과의 은밀한 사랑을 냉정하게 정리하고 포악스럽고 의심 많고 교만스럽기도 한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며 단 한 번도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는 우직한 하인 길상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 길상은 최서희가 조준구에게 빼앗긴 재산을 다시 찾을 때까지 최서희가 바라던 몫을 충실히 다했으니까요.

이른 시각이라 한산하네요.

얼굴이 반반했던 최참판 하녀 귀녀는 최치수 아이를 낳아 신분상승을 위해 칠성이와 공모를 하지만, 발각되어 죽음을 맞고 욕심이 아귀 같은 칠성의 아내 임이네는 용이에게 의지하지만, 용이는 무당의 딸인 월선을 못 잊어합니다.

최서희의 할머니는 연곡사에 불경을 드리러 갔다가 동학군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하여 김환을 낳고, 최서희의 어머니인 별당 아씨는 시동생인 김환과 바람이 나 묘향산으로 도망을 치고, 최서희는 이상현의 집요한 구애를 뿌리치고 길상과 결혼을 하고, 길상을 흠모했으나 길상이 최서희와 결혼을 하자 기생이 되어 버린 봉순은 아편 중독자가 되어 이상현을 만나 딸 이양연을 낳고, 최서희의 둘째 아들 최윤국은 이양연을 사랑하지만, 이양연의 거절로 자원입대하는 등 어떻게 보면 막장 드라마 같지만, 박경리 선생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진주, 북간도를 거쳐 한양으로 이어지는 4대 최참판댁의 몰락과 재기 그리고 그 집안을 둘러싼 주변 인간의 탐욕과 애증·집착을 특유의 잔잔한 화법으로 5부작 15편에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손에 쥔 것 없이 세상을 냉소하던 최서희의 아버지 최치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이런 것을 보면 삶이란 참 허무한 것이기도 합니다.

평사리 최참판댁 사랑채에서 바라본 악양뜰...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집필하면서 한 번도 악양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 세트장이라 하기엔 건물의 사실감이나 크기, 배치, 세월의 흔적 등이 너무나 정교해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따금 댓잎이 바람에 놀라 소스라치네요.

만석꾼 재산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늘 궁금했는데 대충 규모가 가늠이 되는군요.

최참판댁 바로 옆에 박경리 선생 문학관이 있습니다.

소설 토지가 연재되었던 잡지와 신문, 선생이 생전에 쓰시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참고로 선생은 엄청난 골초였다고 합니다.

멀리서 왔고 마침 제철이니 그냥 갈 수 없죠. 말이 2키로지 피 떨고 나면 내용물은 겨우 200그람 남짓합니다.

뚜껑 닫고 20분 정도 구워줍니다.

사이즈가 ㅎㄷㄷ 하네요. 민물 굴이라 짜지 않고 비리지 않아 입 짧은 집사람도 잘 먹네요.

잔뜩 기대한 3만 원짜리 재첩 무침은 여러모로 많이 섭섭했으나 평소 접하지 못한 색다른 음식이라 생각하니 나름 위안이 됩니다.

한 주 후 왔더라면 만개한 매화와 동백을 볼 수 있겠지만, 어마무시한 인파에 치이고 끝없이 이어진 차량 사이에 끼여 견고생할 게 뻔합니다. 진정한 여행이란 때를 기다리지 말고 생각날 때 훌쩍 떠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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