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번개 요란한 토요일 새벽 영남알프스 신불산을 오르기 위해 울주군을 향해 달립니다. 운전하기가 힘들 정도로 쏟아붓던 빗줄기가 경산을 지나니 조금씩 잦아들더니 영천을 지나자 등산하기 딱 좋을 정도로 바뀌는군요. 우리나라 좁고도 넓네요.
등억 온천지구를 지나 간월산장 아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니 그쳤던 비가 또 내리는군요.
비는 금방 그쳤지만, 초장부터 힘듭니다. 요 며칠 선선하던 날씨가 오늘따라 후덥지근하고 조금만 걸어도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습하네요.
가자 신불산으로...
한참을 오르다 보니 느낌이 이상해 현재 위치를 확인하니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군요.
원래 계획은 홍류폭포에서 신불산을 오른 다음 간월재를 지나 임도를 따라 하산하는 거였는데, 어디서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초장부터 꼬여 버렸네요.
몇 번을 돌아설까 하다가 그대로 쭉 걸어가니 하산길인 임도를 만났습니다. 계획했던 코스를 반대로 돌아야겠네요.
내가 제일 걷기 싫어하는 시멘트 포장한 임도를 걷습니다.
멀리 구름에 가려진 신불산을 쳐다보니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
걸어서 오르기도 힘든 저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꽤 있더군요.
구불구불한 임도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에 들어서자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금새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주먹만 한 장대비가 쏟아집니다.
서둘러 레인커버로 배낭을 싸고 50만 원짜리 고어텍스 비옷과 호프힐 오버트라우져를 바지 위에 껴입습니다. 고어텍스가 투습·방습 기능이 좋아 엄청나게 비싸게 팔리지만, 평소에는 입을 일이 별로 없고 비올 때 비옷으로는 그만입니다.
약 30분 정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들이붓는 빗속을 걸었는데도 뽀송뽀송합니다.
간월산장을 출발한 지 두 시간 간월재에 도착했습니다.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이군요.
간월재를 넘어가는 서늘한 바람이 거친 억새를 훑고 지날 때마다 으악새 속삭임이 들리는 듯합니다. 딱딱한 억새의 이삭이 목화솜처럼 복스럽게 부풀 때 즈음...
여기 간월재에 올라 막걸리 몇 사발 먹고 나면 열 번 찍어 겨우 넘어온 녀자가 옆에 있어도 억새 서걱거리는 소리에 왠지 가슴이 시려 서글픈 눈물이 흐를듯합니다.
간월재 휴게소에서 준비해 간 점심 먹고..
신불산으로 출발합니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국방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아름답다 해도 간월재에서 신불산 오르는 하늘 억새 길에 비할 바 아니네요.
가지산에서 천왕산까지 해방 1,000m가 넘는 9개 산이 수려한 산세와 풍광을 자랑하며 총 250만 평에 이르는 억새군락지와 신불산, 가지산, 천황산을 포함한 재약산, 운문산이 산림청이 선정한 남한 100대 명산에 속한 영남 알프스...
이마가 땅에 닿을 듯한 등산로를 따라 꾸역꾸역 오르다가 돌아보니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구름이 드라이아이스처럼 온 천지를 뒤덮고 빗물에 씻겨 티끌 하나 없는 맑은 하늘이 발아래 펼쳐집니다.
그동안 수없이 산을 올랐지만, 오늘처럼 맑고 청명한 하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 저 구름 속으로 퐁당 뛰어들고 싶네요. 3대가 아니라 4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경치를... 쌓아 놓은 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데 이런 행운을 주는군요. 벌어진 턱 땅에 떨어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멍하게 바라봅니다.
이전에 산에 올라 감탄한 모든 것들은 다 과장된 허풍이었습니다.
한참 넋을 놓고 내려보다가 문득 어쩌면 이 가슴 벅찬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서글퍼지는군요.
멀리 종착지 신불산이 보입니다. 신불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데 소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산에 소나무가 없으면 이상하게도 허전함과 생소함이 느껴집니다.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니 또 다른 장관이 펼쳐집니다.
어쩌면 저 짙은 구름은 동해의 푸른 바다 수평선과 닿아 있겠지요.
도시에서 두 시간을 걸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는 산을 좋아 하는 사람에겐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구름이 만든 경치에 넋을 놓은 채 걷다보니 어느새 신불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에 있는 신불재입니다. 30km 영남알프스 하늘 억새 길을 안 걸어보고는 억울해서 못 죽겠습니다.
신불산 정상에서 오랜만에 만난 경남 선수가 건네준 꼬낙을 마시며 이런저런 유쾌한 얘기를 나누다가,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험하다는 칼바위를 타고 하산합니다.
멀리 간월봉을 타고 흐르는 구름이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포말 같습니다.
아~~~ 정녕 이곳이 내가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의 산이란 말입니까?
구름이 깔린 높이만큼 내려오니 축축한 운무가 앞을 가로막는군요.
홍류폭포로 하산합니다. 신불산은 군립공원이라 그런지 이정표가 거의 없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좀 전에 내린 비로 땅은 질퍽질퍽하고 바위는 얼음같이 미끄럽습니다. 곳곳에 간이 콩알만 해 지는 아찔한 구간이 있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걸어 올드 팝송과 뜨로뜨가 엇박자로 노는 간월산장으로 하산완료... 오늘 총 여섯 시간을 걸었네요.
심장 뛰는 소리를 들어가며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간월재와 신불산을 올랐고 이제껏 본 적 없는 가슴 벅찬 풍광을 보았으니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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